12,000km 求法의 길과 마주하다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 위에 서면
바람이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류시화의 '길가는 자의 노래' 중)

길은 떠남이자 만남이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신작로일지라도 늘 새로운 마을이나 도시로 이끌어준다. 하물며 수천 년을 이어져온 길에 있어서야….

실크로드, 2000년을 넘게 동양과 서양의 가교가 되었던 곳. 동서양은 실크로드에 의지해 오랜 세월 문화와 경제라는 이름으로 밀애를 나눴다.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가 동아시아에 깊은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것도 실크로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는 척박한 땅, 거기에 가도 가도 끝을 알 수 없는 아득한 길. 지친 몸을 기대 쉴 나무 한 그루 없고, 하늘을 나는 새 조차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땅. 옛 사람들은 먼저 갔던 이들의 뼈와 해골을 이정표 삼아 이 길을 가야했다.

어쩌면 오늘날 실크로드는 사막의 별과 오아시스 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낭만의 길로 와 닿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은 지난 세월 동안 피와 살과 한숨과 눈물로 얼룩진 고난 그 자체였다. 또 현장, 의정, 법현, 혜초 스님 등이 걸었던 발자국이 배어있는 구도자의 길이기도 하다.

우리가 중국대륙을 가로지르는 실크로드에 나선 것은 지난 10월 7일부터 27일까지다. 산둥반도 북쪽 끝 항구도시 웨이하이(威海)에서 중국 서쪽 끝 상단께 위치한 천산산맥 기슭의 우루무치까지였다. 왕복거리만 1만2000km, 서울에서 부산까지 20번 이상 가야하는 거리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장제스의 국민당에 쫓겨 이동했던 대장정 거리와 비슷하다. 70년 전 추위와 기아, 전투 등 온갖 고초를 겪으며 걸어야 했던 그들과 단순 비교한다는 것이 지나친 비약임을 안다. 그러나 고작 수백 킬로미터의 거리개념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 먼 거리는 분명 '대장정'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실크로드 탐사를 주관한 것은 한중자동차문화교류협회.

이 협회는 자동차를 통해 양국의 문화를 서로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실크로드 챌린지'라고 이름 붙인 이번 대회는 협회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10년간의 노력 끝에 한국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며 중국 대륙을 누빌 수 있었던 첫 성과인 까닭이다.

이 단체의 회장인 현광민 씨. 그는 실크로드에 혼을 뺏긴 중년의 사내다.

1992년 현 회장은 여느 사람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도전에 나섰다. 프랑스 파리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베이징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는 27일간의 랠리. 새벽부터 밤까지 달려야 하는 죽음의 레이스였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이탈자와 사고자들이 속출했다. 그는 이 험난한 길을 이를 악물고 완주했고, 결국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실크로드에 느낀 '황량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은 그로 하여금 실크로드를 떠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사실 한중 문화교류는 경제분야가 활성화된 것에 비하면 대단히 열악하다. 92년 8월 한중수교 이후 몸과 돈만 들어가 관람할 수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탓에 한국의 자동차로 중국 각지를 돌아보는 일이 오랫동안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이런 여건 속에서 이번에 다른 국가 등록차량이 중국의 산하를 누비게 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사건이다. 어쨌든 자동차를 갖고 간 덕에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많은 곳을 다닐 수 있었다.

이번 첫 실크로드 대장정에는 모두 20명이 참석했다.

스텝진 5명(한국2, 중국3)을 비롯해 자영업자, 약사, 주부, 자동차 전문가 등 사는 방식도 다양했다. 여기에 선방에서  오랫동안 참선수행하고 있는 스님들과 멀리 호주에서 포교하는 스님도 동참했다. 실크로드에 참가한 동기들도 제각각이었다. 대부분 스님들이 그 옛날 험난한 길을 오고갔던 구도자들의 길과 그 문화를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라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상화 된 공간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이도 있었다.

쌍용자동차 소속의 4명은 한국 자동차의 본격적인 중국 진출을 앞두고 도로와 지형, 중국의 운전문화 등을 정밀하게 조사하는 임무를 띠고 참여했다. 이유야 어쨌든 실크로드는 모두에게 신비에 가득 차고 미지의 신세계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감은 공통됐다.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짐을 한가득 실은 낙타가 방울소리를 내며 걸었고 그 길들에서 나타나는 신기루 같은 오아시스. 거기에 섬세하면서 거대한 천년의 불교문화가 꽃피었다는 사실이 이런 이미지를 갖게 했는지 모른다.

우리 일행은 21일 동안 줄기차게 달렸다.

빠듯한 일정 탓에 새벽부터 밤 12시가 넘도록 운전해야 했던 때도 많았다. 때론 막 개통된 고속도로에서는 한껏 스피드를 즐겼으며, 빨래판처럼 망가진 도로에서는 머리가 천장에 부딪히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앞차의 뽀얀 먼지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사막의 비포장도로들도 부지기수였다. 여기에 갑작스런 산사태로 먼 길을 돌아가야 했으며, 기름기 철철 흐르는 음식 일색에 슬며시 고추장으로 허기진 미각을 달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에서 수많은 만남을 이루었다. 지평선에서 별이 뜨고 별이 지는 둔황의 밤하늘, 막고굴 석실에서 만난 한없이 부드러운 부처님의 미소, 3000m 고지에 펼쳐진 광활한 칭하이호(靑海湖), 맥적산 낭떠러지 석굴에 전해지는 서위(西魏) 을불황후의 슬픈 출가와 강요된 죽음, 솜처럼 부드럽고 눈처럼 하얀 밍사산(鳴砂山)의 모래들. 여기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광대함과 그 곳을 굽어보는 천산산맥의 웅장함은 갓 뽑아낸 사진을 펼쳐 든 듯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가슴에 와 닿은 것은 실크로드에서 만난 오늘날의 사람들이다. 졸음과 지루함에 맞서 서역으로 끝없이 오고가는 과적차량의 지친 운전자들. 이들에게서 오래된 '전족(纏足)'을 벗고 힘찬 뜀박질을 시작한 중국경제의 놀라운 성장을 엿볼 수 있었다. 또 눈부신 성장의 그늘에 묻혀 깊어져 가는 변방 소수민족들의 깊은 한숨, 설산 몽고족 소녀의 해맑은 눈매와 눈부신 제기차기 실력, 그리고 고산지대를 가로지르며 2000km가 넘는 곳에서 라사를 향해 3보1배를 해 가던 티베트 젊은이들의 모습이 굵은 흉터인양 진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실크로드가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오랜 세월 화려한 영화를 누렸지만 그 지방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정치적인 변화로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그런 실크로드가 20세기 초엽 둔황 막고굴에서 어마어마한 고문서가 쌓여있는 장경동 이 발견되면서 역사의 중심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것이다. 이어 1979년 일본 NHK가 1년 동안 방영한 실크로드 탐사기획도 관광객들의 발길을 불러들이는 촉매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현재 중국이 추진하는 서부대개발 사업. 이는 실크로드의 제2 전성기를 구가토록 하는 주된 원동력이 되고 있다.

실크로드는 과거의 영화로움에서 굳어져 버린 화석도 박물공간도 아니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숱한 구법승들과 대상(大商)들의 뼈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이곳은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터전이었다.

⊙ 저자 이재형 소개

법보신문 에 근무하는 기자로서 2003년 제1회 실크로드 챌린지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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